혁명과도 같은 수프

“수프를 마시는 것만 봐도, 우리들은 접시 위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스푼을 가로로 쥐고는, 수프를 떠서 스푼을 옆으로 뉜 채 입으로 가져가는데, 어머니는 왼손의 손가락을 테이블 끝에 가볍게 얹고, 상체는 꼿꼿이 세운 채 얼굴을 가볍게 쳐들고, 접시는 쳐다보지도 않고 스푼을 잡고는 그대로 수프를 살짝 떠서, 마치 제비처럼, 그런 표현이 적절하다 싶을 만큼 사뿐히 스푼을 입과 지각이 되도록 가져가 스푼 끝부터 수프를 입술 사이로 흘려 넣으신다.
그리고 태연스레 이쪽저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살짝, 어쩌면 작은 날갯짓처럼 스푼을 다루시고, 단 한 방울도 흘리는 일 없이, 후루룩 소리도, 달그락 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건 이른바 남들이 말하는 정식 예법에 맞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그야말로 제대로 된 예법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실 국물 있는 음식은, 고개를 숙이고 스푼을 옆으로 해서 먹는 것보다, 여유 있게 상반신을 세우고 스푼 끝에서 입으로 흘려 넣어 먹는 편이 신기하게도 맛있다.
하지만 나는 나오지의 표현대로 고급 거지이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그렇게 살짝, 아무렇지도 않게 스푼을 다룰 수는 없어서, 할 수 없이 단념하고 접시 위로 고개를 숙이고, 예의 정식 예법에서 말하는, 따분한 방법대로 먹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국보급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1909~1948)는 1909년 아오모리 현 기타 쓰가루 군 마을의 대지주인 츠시마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츠시마 가문은 아오모리 현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냈을 정도로 집안의 위세가 대단했으나 증조부가 가문을 일으킨 방법은 고리대금업이었다고 합니다. 쓰가루 평야 소작농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막대한 부를 이뤘고 귀족 신분도 돈으로 샀던 것입니다. 이러한 집안 내력과 유년 시절 애정 결핍은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 문학 작품 속에 수많은 얼룩으로 어지럽혔던 이유가 됩니다.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꽃잎처럼 스러져 가고 유복한 집안 환경에서도 외로울 수밖에 없었으니, 실존적 정체성에 대한 그의 의문은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죠.

대학생이던 다자이 오사무가 첫 애인으로 게이샤(기생)를 집안 어른에게 소개했던 일화는 치기어린 소동 정도로 마무리 되었을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인생은 끝없는 자살 시도와 마약 중독 등 허무와 방황으로 점철됩니다. 그의 대표작 ‘사양’은 전쟁 이후 몰락해 가는 집안의 이야기를 담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사양’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몰락해가는 귀족 가문의 딸 가즈코와 생활이 어렵지만 고귀한 성품을 잃지 않으려는 어머니, 전쟁에 징집되어 고향에 돌아온 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가 결국은 자살을 선택하는 동생 나오지가 등장 인물로 나옵니다.

전쟁과 삶의 비탄에 빠졌던 어머니와 동생을 잃고 주인공 가즈코는 오랜 시간 간직했던 마음을 문학선생인 우애하라에게 내비칩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아이를 갖게 되지만 이 남자 역시 술과 도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결국 가즈코는 아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으며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허랑방탕했던 다자이 오사무가 방탕한 삶을 살다 스스로 세상을 떠났고 올해가 그의 서거 70주기였습니다.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존재다.”

일본 문학사 속에서 지금까지 일본인들에게 경구처럼 회자되는 이 문장은 가즈코가 남긴 독백입니다. 부드러운 수프를 한 수저 뜨면서 우리 삶의 작은 일부가 혁명이 될 수 있음을, 사랑과 혁명을 나즈막히 외쳤던 가즈코의 외마디를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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