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가을 운동회가 있었습니다. 편안한 옷을 입고, 느긋한 마음으로 아 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점심시간이 가까웠을 무렵, 낯이 익은 아이들 몇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한 아이가 묻더군요. “아저씨, 데쌍트는 일본 브랜드죠? 그러니까 데쌍트 옷을 산 애, 친일파 맞죠?” 그러면서 그 브랜드 옷을 입은 아이를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나, 친일파 아니야!”라고 댓거리를 했지만 중과부적. 이런 종류의 싸움은 으레 한 아이의 울음으로 정리되곤 합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운동회가 끝나고도 아이들의 모습이 기억에서 쉬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먼 산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김민기의 노래 ‘금관의 예수’가 입속에 맴돌았습니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 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 아빠들의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아이들 이야기로 분위기가 무르익고, 술이 한 순배 돈 직후였습니다.

 

한 아빠가 “기자들은 조국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며 기습 질문 을 하더군요.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사이, 이미 아빠들 사이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대화는 광화문과 서초동을 오가며 한참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미디어가 지탄의 대상으로 부상 하더니, 급기야 누군가의 입에서 “에이, 기레기들!”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아이들의 싸움이 한 아이의 울음으로 끝이 나듯, 그날의 토론은 ‘에이, 기레기들!’이란 말로 정리가 됐습니다. 술기운에 토론의 여파까지 겹쳐 이래저래 어지러운 밤이었습니다.

 

심호흡을 하고 바라본 밤하늘엔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편치 않은 마음 탓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뒤척이다 서가로 가, 시집 한권을 꺼냈습니다. 함민복의 시집이었습니다. 거기 ‘산’이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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