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더 한가롭게 느껴지던 주말이었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딸아이와 나선 산책길에 아파트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장서는않지만 인적이 드물고 오붓해 가끔 들르는 곳입니다.

딸아이에게 동화책 2권을 읽어준 후 느긋하게 서가를 배회했습니다. 그러던 중 헤르만 헤세의 소설 ‘크눌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중학교 1학년, 큰누이의 책상에서 우연히 만난 그 ‘크눌프’였습니다. 그때는 책 제목이 ‘크놀프 삶으로부터의 세 이야기’였습니다.


방황을 시작하던 중학교 1학년 청소년에게 ‘크눌프’는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크눌프’를 알고부터 한참을 헤르만 헤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중학교 3년 내내 헤르만 헤세는 시골 중학생의 머리를 지배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대출을 하고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소설에 빠져들었습니다. 소설은 ‘초봄’, ‘크눌푸에 대한 나의 회상’, ‘종말’ 등 모두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당황스러운 건 ‘초봄’과 ‘크눌푸에 대한 나의 회상’ 정도만 기억에 남아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억의 숲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종말’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이번에는 ‘종말’부터 읽었습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신선했습니다. 책을 읽은 후의 느낌은 물론 좋았습니다. 특히 중학교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어,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습니다.


곧 있으면 추석입니다. 추석 귀향길은 언제나 설렙니다. 도시화·산업화로 많이 퇴색되었다고는 하지만 추석 귀향길은 여전히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입니다. 그리운 고향 산천과 부모,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년과 청소년기의 ‘내가’ 거기 있습니다.


빗물 때문에 뭉툭해진 돌계단과 문 옆의 둥그스름하고 우람한 모과나무는 예전 그대로였다. 아직 라틴어 학교에서 쫓겨나기 전이었을 때 크눌프는 이곳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한때 완전한 행복과 부족함 없는 충만함, 고뇌를 모르는 경건함을 경험했었다. 여름이 되면 버찌를 훔쳐 먹는 즐거움이 있었고, 비록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지만 정원사가 되어 자신의 꽃들을 관찰하며 돌보는 행복에 깊이 빠져든 때도 있었다.
- 크눌프의 ‘종말’ 일부


죽음을 앞둔 크눌프가 고향마을로 돌아와 젊은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올 추석에는 크눌프처럼, 모두 젊은 날의 꿈 많던 자신을 만나길 바랍니다. 그 만남을 통해 영혼의 허기를 넉넉히 채우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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