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서문 밖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숙자 한 명이 다가와 담배를 구걸했다. 고개를 젓고 휴대폰에 몰입해 있는데 어쩐지 심란했다. 종종 겪는 일인데 오늘 따라 왜 이럴까. 담배 맛도 갑자기 식었다. 돌아서 흡연실을 나오며 노숙자에게 한 가치 남은 담뱃갑을 건넸다. 그가 담뱃갑을 열어보고는 “어? 한 가치네?” 하고 중얼거렸다. 원래 한 가치를 원한 것 아닌가? 담뱃갑째 받았다가 뭔가 속았다고 생각한걸까? 찜찜해하며 발길을 돌리는데 그가따라와 담뱃갑을 건네주며 말했다.
“한 가치 남은 걸 받을 수는 없어요.”
헛. 요샛말로 심쿵했다. 오래 전 유행했던 은어 ‘돗대(는 아버지에게도 안 준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노숙자 나름의 원칙이 있나 보다 싶어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비흡연자들이 대부분일 것이므로 설명을 덧붙이자면, 마지막 남은 한 가치의 소중함을 흡연자들은 일본식 은어 ‘돗대’로 불렀다. 물론 지금은 거의 사라진 용어.)


그날 식물환자를 둔 가족 얘기를 들었다. 한탄과 위로가 오가며 대화가 방황했는데 식물환자란 용어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빗댄 표현이지만 식물은 동물보다 훨씬 강하고 역동적임을 간과한 것이라고, 누군가 교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주장을 새삼 새겨 본다.

‘식물은 이동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이동하지 않고도 번식할 수 있고 장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동물과 수많은 식물들을 비교해 보면 식물의 수명이 훨씬,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식물이 움직이지 않고도 장수할 수 있는 까닭은 외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기 때문이고, 그 얘기는 환경에 적합하게 자신의 기능을 조절할 줄 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고등하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식물들은 열심히 움직여서 살아야 하는 동물들을 가엾게 보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고로 우리는 식물에게 깊은 사과를 해야 한다. 그의 말대로 머잖아 식물인간이란 단어가 수정되기를 기대한다. 식물 얘기를 하다 보니 여기에서도 수정하고 사과할 것이 생겼다. 노숙자가 담배를 구걸해 왔다고 받아들인 것은 그가 노숙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노숙자가 아닐 수도 있다. 노숙자라 하더라도 구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식물들도 이렇게 복잡다단한 고민들을 할까마는.

저작권자 © 더바이어(The Buye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