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수렁에서 뜬 한 술



“뺨이 여위어 드러나 보이는 광대뼈에 검버섯이 얼룩진 딸의 얼굴을 보자 모질게 먹은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다시금 설움이 복받쳐 입을 삐죽대고 섰는데, 딸이 눈을 번쩍 떴다.
“어머니 점심때가 겨웠나봐. 뭣 좀 주세요.”
“오냐 오냐. 암 먹어야구 말구. 뭐가 구미가 당길 것 같는? 뭐든지 해줄 테니까 말만 하려무나.”
“된밥에 호박김치나 푹 무르게 끓여주세요. 제육 몇 점 넣으면 참 맛있겠다.”
꼴깍 소리가 나게 침까지 삼키며 말하고 나서 돌아눕는 딸을 보고 박씨는 가슴이 천길 만길 내려앉는 것 같았다.
(중략)
서둘러 밥을 앉히고 제육 몇 점 썰어 넣은 호박김치 뚝배기를 화로에 얹어 놓고 이것저것 밑반찬을 챙기는 사이에, 다시 아까의 의심이 흉한 그림자처럼 박씨의 마음을 어둡게 차지했다.”


작가 박완서의 소설 ‘미망’ 속 머릿방아씨는 남편과 사별 후 일순간의 실수로 친정 머슴의 아이를 갖게 됩니다. 절망에 빠진 그녀가 대청마루에서 목을 맸으나 시아버지가 구해준 뒤 아이를 낳으라며 친정에 보내줍니다. 친정에 도착한 머릿방아씨는 어머니가 끓여 준 호박김치찌개를 한술 뜨며 삶의 의지를 보이는 장면입니다. 죽음의 기로에서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그럼에도 살아가기를 결심한 머릿방아씨가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음식이 바로 제육을 넣어 끓인 호박김치찌개입니다.

작가 박완서는 생전에 늘 “전쟁의 상처로 지금껏 글을 썼다“고 했습니다. 궁핍한 시절을 지나왔으나 작품에 등장하는 부엌과 음식만큼은 속속들이 제 맛과 온기를 발합니다. 그이의 작품만큼 생동감 넘치는 묘사의 요리가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요. 어느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친정이나 시댁이 옷치레나 집치레는 하지 않아도 음식치레는 반드시 했다고 밝히기도 했죠. 그만큼 사철과 절기에 맞는 음식을 해 먹던, 밥상에서 쌓인 대가족의 정이 요즘같지 않게 강건했던 때였습니다.

특히 작가 박완서의 고향인 개성을 무대로 한 이 소설에서도 음식치레가 자주 언급됩니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고 상업이 발달했기에 식재료가 넘치는 맛의 고장이었죠. 상에 올리는 음식에 아낌이 없던 개성상인의 자부심이 대대로 이어져 맛깔난 음식으로 유명합니다.

소설 속 머릿방아씨가 나락에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일어서기를 마음먹었을 때 한술 뜬 찌개, 작가 박완서는 애 닳게 살아도, 허무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살아도, 한술 뜬 음식이 선사할 인생의 위무를 넌지시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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